
2026년 6월 23일 밤, 미국 보스턴의 잔디 위에서 묘한 장면이 펼쳐진다. 잉글랜드 대표팀과 가나 대표팀이 마주 선다. 양 진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이 보인다. 코비 마이누, 앙투안 세메뇨, 제롬 오포쿠, 브랜던 토마스아산테. 네 청년 모두 잉글랜드에서 나고 자랐다. 같은 거리에서 공을 찼고, 같은 잉글랜드 축구의 문법으로 다듬어졌으며, 핏줄은 똑같이 가나를 향한다. 그런데 오직 ‘마이누’만 잉글랜드의 흰 유니폼을 입는다. 나머지 셋은 가나의 검은 별을 가슴에 단다. 한 골목에서 출발한 발걸음이, 대표팀의 경계선 앞에서 갈라진다.
이 갈림길은 우연이 아니다. 그 뒤에는 한 세기가 넘는 제국과 이주의 역사가 흐른다. 가나는 한때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잉글랜드 26인 명단을 들추면, 카리브해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들의 아들과 손자가 즐비하다. 주장 후보 마르크 게이는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났고, 적어도 아홉 명이 부모 중 한 사람을 바다 건너에 둔다. 반대로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24명이 이번 대회에서 다른 나라의 유니폼을 입는다. 그중 19명은 영국 바깥의 국가를, 다섯은 스코틀랜드를 택했다. 축구는 한 번도 단순한 공놀이였던 적이 없다. 그것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골대 뒤편에는 식민 지배와 전후 영국으로 밀려든 이주의 물결이 흐른다. 공 하나가 굴러갈 때마다, 그 역사가 굴러간다.
옥스퍼드대학교 이주관측소의 조사는 이 변화를 숫자로 보여 준다. 2026년 월드컵에 선발된 1,248명 가운데 23.6퍼센트가 태어난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대표한다. 대회 역사상 가장 높은 비율이다. 20년 전인 2006년 대회에서 그 수치는 9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FIFA가 대표팀 자격 규정을 손질했다. 21세 이전, 성인 공식 경기 출전이 세 번을 넘지 않으면 대표팀을 바꿀 수 있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유럽 최고의 아카데미에서 길러진 인재들이 부모의 땅으로 돌아간다. 격차는 좁아진다. 96퍼센트가 외국 태생인 쿠라사오, 85퍼센트의 콩고민주공화국이 강호와 어깨를 겨룬다. 2022년 모로코는 모하메드 6세 아카데미와 디아스포라 인재를 앞세워 아프리카 최초로 4강에 올랐다. 26인 중 14명이 외국 태생이었다. 물론 이주가 우승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같은 해 우승한 아르헨티나에는 외국 태생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디아스포라는 더 이상 각주가 아니다. 디아스포라가 본문이다.
이야기에는 그늘도 있다. 검은 피부로 서구의 유니폼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무게인가. 1978년 11월, 비브 앤더슨이 잉글랜드 성인 대표팀을 밟은 첫 흑인 선수가 됐다. 1982년, 루더 블리셋이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터뜨리며 득점한 첫 흑인 선수가 됐다. 1993년 6월, 폴 인스가 공교롭게도 보스턴에서 미국을 상대로 처음 주장 완장을 찼다. 그리고 2026년 6월, 리오 응구모하가 뉴질랜드전에 데뷔하며 잉글랜드를 대표한 127번째 흑인 선수로 기록된다.
이것은 통계가 아니다. 저항과 의지로 깎아 낸 이정표다. 그러나 같은 나라가 흑인 선수를 국가의 영광으로 떠받들다가도, 그들의 소속감을 조건부로 만든다. 마커스 래시포드, 자돈 산초, 부카요 사카가 겪은 일이 그렇다. 라힘 스털링은 동료들보다 더 무거운 잣대에 시달렸다. 한 평론가가 앤디 콜에게 "골 하나 넣으려면 기회가 다섯 번은 필요하다"고 했고, 그 말은 낙인이 되어 따라붙었다. 칭송과 조롱이 한 사람을 두고 번갈아 든다.
그래서 누군가는 다르게 선택한다. 형, 이냐키 윌리엄스는 가나를, 동생 니코 윌리엄스는 스페인을 택했다. 겔라 두에는 코트디부아르를, 동생 데지레 두에는 프랑스를 택했다. 이브라힘 음바예는 프랑스 대신 세네갈을, 아이유브 부아디는 프랑스 대신 모로코를 골랐다. 한 식탁에서 자란 형제가 서로 다른 국가를 가슴에 단다. 더 이상 떠밀려서가 아니다. 스스로 원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날 밤 경기는 0 대 0으로 끝났다. 승부는 가려지지 않았으나, 그라운드 위에는 더 깊은 질문이 가려지지 않은 채 남았다. 잉글랜드와 가나가 월드컵에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나라의 유일한 인연은 2011년 웸블리의 친선경기, 1 대 1 무승부뿐이었다. 그 무승부가 15년 시간을 건너 다시 무승부로 이어진 셈이다. 나는 이 경기를 보며,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두 개의 고향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어디에 속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뛸 것인가.

이것은 축구 선수만의 물음이 아니다. 낯선 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두 언어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 조국을 떠나 다른 민족을 품는 선교사,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의 물음이기도 하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어쩌면 소속이란, 태어난 자리가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단한 자리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이누’가 흰옷을, 세메뇨가 검은 별을 택했듯, 우리도 매일 무엇인가를 향해 유니폼을 갈아입는다. 공 하나가 국경을 넘나드는 이 밤, 나는 가만히 묻는다. 우리의 진짜 고향은 태어난 땅인가, 아니면 우리가 끝내 사랑하기로 한 그 자리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