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효 화백 ‘붓 끝으로 길어 올린 구도(求道)의 세계’

-평면을 깨고 나온 전통의 미학, 오방색과 입체적 마티에르로 그려낸 영혼의 지도

-역경을 거스르는 잉어와 번뇌를 벗어던진 나비, 시대를 위로하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묵직한 구도의 길

예술가에게 작업실은 어떤 공간일까.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조형 실험을 감행하는 연구실이자,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잠시 도피하는 안식처일 터다. 하지만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오롯이 ‘한국의 이미지’라는 거대한 화두를 붙잡고 씨름해 온 백낙효 화백에게 작업실은 다름 아닌 ‘법당(法堂)’이자 ‘수도원’이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심미적 유희나 일시적인 감정의 배설을 넘어, 흐트러진 내면을 다스리고 본연의 인간성을 찾아가는 엄숙한 수행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현대 미술의 조류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자극적이며 일회적인 시각 매체가 범람하는 2020년대의 한가운데서 통산 16회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묵묵히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 온 백낙효 화백의 작품은 기묘한 울림을 준다. 그의 화폭 앞에 서면 관람객들은 이내 엄숙하면서도 따뜻한 평온함에 사로잡힌다. 화면 바탕 깊은 곳에서부터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오방색의 정취, 그리고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묵직한 두께감은 서양화라는 매체를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한국적이고 정신적인 깊이를 자연스럽게 자아낸다.


백 화백은 평생에 걸쳐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명제를 온몸으로 증명해 왔다. 그러나 그의 한국성은 단순히 옛것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거나 박제된 전통을 박물관에서 고스란히 꺼내오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선조들이 삶 속에서 간절히 추구했던 길상(吉祥)의 염원, 자연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 그리고 우주의 섭리를 통찰했던 철학적 사유를 현대적인 회화 언어로 완벽하게 재해석해 냈다. ‘수행하는 작가’라는 별칭이 늘 그의 이름 앞에 수식어처럼 붙는 이유 역시, 작품 한 점 한 점에 깃든 그의 숭고한 영적 노동과 치열한 자아 성찰을 대중이 먼저 마음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공화.어룡농주. 30P  

◇‘릴리프 기법’의 탄생과 미학

백낙효 화백의 예술 세계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릴리프(Relief, 부조) 기법’이다. 그의 작품을 실제로 마주한 이들은 평면의 캔버스 위에 외곽선들이 1~2mm가량 입체적으로 돌출되어 있는 독특한 마감을 보며 경탄을 금치 못한다. 마치 도자기를 빚을 때 흙띠를 정교하게 두른 듯, 혹은 전통 건축의 단청이나 창살이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는 듯한 이 기법은 백 화백만이 구사하는 유일무이한 예술적 지표다.


이 독창적인 기법의 시작은 수십 년 전, 그의 초창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의 작품을 눈여겨보던 은사들과 미술계 선배들은 그에게 한 가지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그림의 소재와 구성은 참 좋은데, 화면에 조금만 더 무게감과 두께감이 더해지면 좋겠다"라는 이야기였다. 평범한 작가라면 가볍게 흘려들었을 수도 있는 그 한마디가 청년 백낙효의 가슴에는 예술 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화두로 자리 잡았다.


평면의 캔버스 위에 어떻게 해야 동양적인 깊이와 서양화의 묵직한 마티에르(질감)를 동시에 구현할 수 있을까. 수많은 시행착오와 밤샘 연구가 이어졌다. 마침내 그는 캔버스 바탕 위에 젯소와 특수 혼합 재료를 활용해 밑그림의 아웃라인을 부조 형식으로 먼저 도드라지게 성형한 뒤, 그 위에 유화나 아크릴 물감으로 수차례 덧칠해 나가는 자신만의 기법을 완성했다.


100호가 넘어가는 대작 위에서도 자와 컴퍼스 없이 정교하게 뻗어 나가는 이 입체적인 선들은 그 자체로 고도의 집중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수행이다. 선 하나가 미세하게 삐뚤어지거나 높낮이가 맞지 않으면 화면 전체의 균형이 단숨에 무너지기 때문에, 온 신경을 손끝에 모으고 숨을 죽인 채 선을 쌓아 올려야 한다. 때문에 미술계에서는 “백낙효의 작품은 기법이 워낙 독보적이고 정교하여 그 누구도 가품을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선과 면이 만들어내는 이 미세한 음영은 조명의 각도와 관람자의 시선에 따라 매 순간 다른 표정을 지으며 화면에 영원한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노랑꽃 어룡농주 20F  

◇전통 문양 속에 감춰진 인간학

백낙효 화백이 화폭에 불러들이는 주된 소재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면서도 깊은 상징성을 지닌 한국의 전통 문양들이다. 연꽃, 나비, 박쥐, 잉어, 꽃병, 그리고 도깨비에 이르기까지,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매개체들은 저마다 뚜렷한 이야기와 염원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그의 화폭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단연 ‘잉어(어룡, 魚龍)’와 ‘나비’다.


백 화백의 세계에서 잉어는 단순히 부귀영화나 과거 급제를 기원하는 민속적 상징을 넘어선다. 불교에서 잉어는 밤낮으로 눈을 뜨고 지내며 묵묵히 수행하는 정진을 뜻하며,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된다는 '등용문'의 설화처럼 인간이 번뇌를 끊고 성불의 경지에 이르는 사유의 과정을 상징한다. 화백은 화면 속에 생동감 있게 꿈틀대는 잉어의 비늘 하나하나를 입체적으로 세우며, 자신을 포함한 모든 현대인이 삶의 역경을 이겨내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기를 기원한다.


나비와 박쥐 역시 마찬가지다. 민화에서 나비가 부부의 화합이나 장수를 뜻한다면, 백 화백의 캔버스 안에서 나비는 고된 애벌레와 번데기의 시절을 견뎌내고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르는 ‘영혼의 부화’를 의미한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 지내는 박쥐는 세상의 편견과 반대로 살아가면서도 자신만의 길을 걷는 도인의 풍모를 닮았다. 여기에 액운을 막아주고 복을 불러오는 도깨비의 해학적인 얼굴, 세상의 모든 조화를 담은 음양오행의 색채 등이 릴리프 기법과 만나면서 그의 작품은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부적’이자 ‘기도문’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전통 문양은 미개한 미신이 아니다. 자연과 우주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고자 했던 선조들의 위대한 철학적 유산이자 인간학이다. 내 그림이 종교와 세대를 초월하여 대중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는 것은, 그 기저에 인류 보편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자비’의 마음이 정성스레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농악. 100M. 2015  


◇밀양의 아들, 현실과 수행의 경계를 넘다

오늘날 전업 작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굳힌 백낙효 화백이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여느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이상 사이의 치열한 줄타기였다.


그의 예술적 뿌리는 고향 밀양에 깊이 닿아 있다. 전통과 문화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밀양 아랑제(밀양문화제)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키워온 그는, 오랜 세월 중·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길을 걸었다. 교육자로서의 책무를 다하면서도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시간을 쪼개고 영혼을 갈아 넣는’ 삶이었다. 남들이 퇴근 후 휴식을 취하거나 주말을 즐길 때, 백 화백은 작업실로 직행해 붓을 잡았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인자한 선생님으로, 밤에는 캔버스와 사투를 벌이는 고독한 예술가로 살았던 그 시간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화단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그는 한국예총 예술대상, 한국미술협회 서양화 부문 대상 등 굵직한 상을 받으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공고히 인정받았다. 특히 고향인 밀양에서는 그를 지역 미술을 빛낸 거목으로 예우하며 밀양아리랑아트센터에서 대규모 초대전(우수 작가 초대전)을 개최하는 등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도 했다. 교직 퇴임 후 마침내 온전한 자유를 얻었을 때, 고향에서부터 차근차근 다져온 그의 예술적 에너지는 기다렸다는 듯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백 화백은 평소 공자의 가르침인 ‘물유본말 사유종시(物有本末 事有終始)’라는 문장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왔다. ‘만물에는 근본과 말엽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는 이 말은 그의 예술 철학을 관통하는 뼈대다. 그는 현상을 좇기보다 근본을 찾으려 했고, 시작한 일은 반드시 묵직한 결실을 보며 끝을 맺었다.


▲노랑꽃 화원 20F 2025  

◇푸른 바다의 심장, 예술로 호흡하다

과거의 명성이나 이력에 안주하지 않는 백 화백의 청년 같은 예술혼은 최근 부산 미술계의 뜻깊은 대규모 문화 축제에서도 여실히 증명되었다. 백 화백은 지난 5월 1일부터 25일까지 국립해양박물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된 ‘2026 KOBC 해양미술페스티벌 기획전’에 대표 작가로 참여해 대중과 깊이 호흡했다.


‘해양의 푸른 심장! 아트로 호흡하다’를 주제로 열린 이번 페스티벌에서 백 화백의 입체적인 릴리프 작품들은 평단과 관람객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생명과 순환의 근원으로서 해양을 바라보는 축제의 철학이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그의 ‘잉어’와 번뇌를 깨고 나온 ‘나비’의 세계관과 완벽하게 공명했기 때문이다. 평생 미술 교사로서 아이들을 지도했던 그에게, 축제 공간에서 시민 및 미래 세대와 직접 창작의 즐거움을 나누는 현장은 더욱 남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이번 전시는 해양문화 도시 부산의 정체성을 예술적으로 재조명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룡농주 10F. 2026  

◇시대를 향한 따뜻한 위로, 그리고 영원한 청년 화가

백낙효 화백의 흔적은 이미 수많은 곳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부산시립미술관을 비롯해 밀양시청, 동아대학교, 부산시학생문화회관 등 국내 유수의 기관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예술적 성취가 이미 공고한 역사로 자리 잡았음을 방증한다.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입체적인 조형물들은 오늘도 차가운 콘크리트 벽을 넘어 인간의 온기와 대자연의 생명력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를 상처 입히고,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빈곤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백낙효 화백의 그림은 묵묵히 말을 건넨다.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잉어처럼 묵묵히 네 길을 가라고, 번데기의 어둠을 견뎌내면 반드시 화려한 나비처럼 날아오를 날이 올 것이라고.


붓을 잡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여전히 채워야 할 화두가 많다는 백낙효 화백. 그의 작업실 창문 너머로 밤이 깊어가도 릴리프 선을 세우는 그의 정교한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캔버스 위에 새겨진 도톰한 외곽선만큼이나, 그의 예술과 삶의 깊이는 우리 시대의 커다란 정신적 등대로 우뚝 서 있다. 그의 붓 끝이 향하는 다음 구도의 여정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연꽃 어룡농주 20F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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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26.06.15 09:34 수정 2026.06.15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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